전라북도 군산은 조선 시대 때부터 서해안의 중요한 항구 중 하나로 주목 된 곳이다. 청일전쟁 이후 1899년 5월에 개항된 이곳은 개항 이전에도 조운의 중심지로서 부근 7개 읍의 미곡 집산지였다. 근래에는 군산·장학국가공업단지, 군산 국가공업단지의 조성과 더불어 중부권 화물 운송의 거점 항만으로 개발되어 호남 지방의 관문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만큼 지 않은 수의 공구상이 군산에서 장사하고 있는데 경쟁이 치열한 이곳에서 불과 10년 만에 크게 성공한 공구상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의류제조업에서 공구유통업으로
전북 군산에 위치한 세화공구는 세워진 지 겨우 10년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수십 년 된 공구상 못지않게 큰 외형을 자랑하며 많은 수의 품목을 갖춰 놓은 곳이기도 하다. 이런 세화 공구를 세우고 키운 사람이 바로 올해로 마흔여섯의 조광수 대표. 서울에서 의류제조업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조광수 대표는 2004년 군산에 내려와 공구업을 하게 된다. 의류업에서 공구상으로 변신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원래 제가 하고 있던 의류제조업은 중국시장에 밀리고 있었어요. 서해만 건너면 저렴한 인건비를 지닌 중국이 있으니 이제는 다른 사업을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매형이 제게 군산에서 공구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어요. 처음에는 정말 막연하게 잘 되겠지 하는 마음에 내려와 사업을 시작했는데 만약 그때 지금처럼 공구업이 만만한 사업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면 엄두를 못 냈을 거예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예전에 직업으로 삼았던 의류 제조업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하는 공구업처럼 많은 공부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조광수 대표는 의류제조업을 통해 나름대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큰 성공을 하고 싶어 업종을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원래 부드럽고 화려한 천을 만지고 고르던 사람이 딱딱하고 무거운 공구를 다루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다양한 공구품목 중 군산지역에 필요한 공구품목을 찾기 위해 많은 연구와 공부를 해야만 했다.
공구지식 배우러 돌아다녔죠
"처음 공구상을 차릴 때도 공구업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2004년도에 시작을 했을 때 처음 투자금이 한 2억이 넘었을 거에요. 그런데 공구 파는 감각을 전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전주, 김제에 위치한 큰 공구상들을 찾아가 물건을 사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물론 처음에는 남의 집에서 어느 정도 배우고 시작을 했죠. 그래도 모자라니까 다른 공구상에 가서 물건을 사보고 몇 년 동안 서울의 여러 공구상에 가서 시장가격을 조사해 보는 등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어요."
조광수 대표는 사업 초창기 공구상을 찾아가 일반 소비자처럼 물건을 사곤 했다. 그렇게 안목을 키워 나가며 사업을 했다. 공구상을 찾아다니다 솜씨 좋은 공구상을 만나면 자신도 공구상을 하는데 이런저런 부분은 참 훌륭하다고 말씀드리고 자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며 묻곤 했다. 조광수 대표는 그때 만났던 공구상들과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구색 욕심과 서비스 그리고 가격 경쟁력
조광수 대표가 크게 성공한 공구상을 찾아다니며 익힌 비결은 그대로 가게의 수익으로 돌아왔다. 물론 성장하면서 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기도 세화 공구의 급격한 성장세를 막지 못했다.
“위기상황은 사업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나면서 매장확장 이전 문제라던가 2008년도 같은 경우 부도어음을 받는 경우도 있었죠. 그때 당시에 금융위기가 있었잖아요. 그때 못 받은 돈을 지금까지 못 받았죠. 부도 어음을 받아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구색이었어요. 구색을 갖춰서 소매가 잘 되더라고요. 납품이랑 소매 배율이 7대 3 정도 되는데 확장을 했던 이유도 사실 소매 비중을 더 키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거래하던 회사가 공중분해 되었어요. 거래하던 회사가 공중분해 되니까 수금 자체가 안되더라고요. 그때 당시 군산에 현대중공업이나 조선업이 들어올 때였는데 소규모 조선소들은 시기를 타고 잘 되니까 서둘러 세워졌다가 조선업이 불황 되니금방 쓰러지기도 했죠. 그러면서 돈을 못 받고 그랬죠.”
소매장사는 안정적으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다. 반면 납품영업은 현금 유동성이 불안해지지만, 사업을 크게 키우는 길. 세화공구는 납품영업과 소매를 동시에 하여 안정성과 성장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다.
“납품과 소매 둘 다 하면서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소매만큼 구색도 갖추어야 하고 또 이익률을 적게 받아야 손님이 오죠. 그러니 이익률이 떨어지는 것을 대신해 임대업을 시작했고요. 공구 수리를 통해 또 이익률을 보전했죠. 공구상을 하면서 지금까지 한눈팔 여력은 없어요.”
지역 경제 변화에 대비해야
세화공구가 크게 성공한 것에는 이것 외에도 변화되는 군산 경제에 발맞춰 변화한 것이 유효했다. 대기업의 조선소가 군산에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조선소에 필요한 품목을 미리 구매해 둔 것이다.
“커다란 조선소가 이곳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맞추어 구색을 갖추고 준비했죠. 실제로 조선소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군산에서는 우리 집 밖에 없었을 겁니다. 미리 다른 지역 조선소 근처의 공구상에서 조선소에서 쓰이는 품목들을 조사했죠. 어떻게 보면 우리 집은 군산에서 후발주자잖아요. 그러니 납품을 하더라도 기존의 업체 납품을 뚫는 것보다 새로 군산에 들어오는 기업의 납품을 뚫으려고 노력을 했죠. 장사는 두 가지예요. 돈은 좀 못 벌지만 앉아서 편하게 장사를 하는 것과 찾아가는 영업을 하는 것. 그리고 지역 경제 변화를 찾아내서 거기에 맞추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세화 공구의 성장은 조광수 대표의 노력과 끝없이 배우려는 자세에 있었다. 동시에 지역 경제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하는 자세를 꼽을 수 있다. 이제는 성장보다 안정을 추구할 정도로 크게 성공한 세화공구의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