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는 첨단시대에도 필수 산업
“1986년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그 해였어요.”
공구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김석호 대표는 1986년을 떠올렸다. 건축가구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직장생활을 하던 26살 청년 시절인 그 해, 김 대표는 아시안게임 성화 봉송 주자로 뽑혀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맞이했다. 동시에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혀 모르는 ‘공구’ 파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당시 회사 거래처에 공구를 판매, 수리하는 업체가 있었는데 관심을 갖게 됐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뜨는 업종, 지는 업종, 대형업체의 등장으로 사라지는 업종 등 먼 미래를 봤을 때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때였죠. 문득 공구는 우주첨단시대가 변하더라도 없어서는 안 될 제품이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고생을 사서 한다는 가족, 친구, 동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 나이에 창업을 했다. 참신하게 전진한다는 의미의 ‘신진공구’. 가게도 없다. 적금을 전부 해약하고 달랑 포터 트럭 한 대와 전화기 한 대로 장사를 시작했다.
지방업체 방문판매로 사업 일궈
“어린 나이니까 실패해도 괜찮다. 단지 최선을 다해 보자라는 각오였어요.”
지인의 소개를 받아 경북 일대를 도는 공구 방문판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5개월만에 교통사고 인명피해가 났다. 결국 구속에 이르렀고 큰 충격을 받았다.
“괜히 이 일을 시작했나 후회를 많이 했어요. 다행히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잘 해결됐지만 자유인이 되고 나서도 3개월 동안 방황했죠.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입힌 상처가 저에게도 마음의 상처로 돌아왔어요.”
그러나 도움주신 분들께 보답하는 방법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다시 일어섰다. 경북, 경남, 강원도 일대 교통낙후 지역에 위치한 소규모 공장과 중소제조업체를 돌며 공구 방문판매를 시작했다. 기름값 안 나오는 날도 많았고 며칠씩 집에 못 들어오는 건 기본이었다. 그러나 선주문, 선결제, 후배송 방식으로 내실을 다지고 업체 방문시 사용방법, 작업요령 등 정보를 제공했다. 거래처가 또 거래처를 소개해 주면서 사업이 안정됐고 1992년 ‘신진목공기계공구’ 매장을 열었다.
결제방법 바꾸어 경영구조 개선
온라인 홈페이지 개설해 미래 대비
1995년 대만 방문으로 김 대표는 또 한번 변화를 시도한다.
“당시 공구계 대표들과 대만을 방문했어요. 타이페이 외각에 영국 BNQ에서 운영하는 초대형 공구매장을 들렀는데 모래부터 지붕마감재까지 공구, 철물, 건자재... 엄청난 규모에 깜짝 놀랐어요. 현지 소비자도 엄청나게 몰려 있었죠. 반대로 5km에 달하는 시내 공구거리는 1/5이 폐업을 했더군요. 우리가 타이페이와 같은 운명을 걷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어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김 대표가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결제방법 변화였다.
“1996년까지도 공구업계는 외상거래, 설추석 대목결제, 연말결제 등 비합리적인 결제구조가 만연했어요. 일단 수년 동안 계속된 외상거래를 끊고 결제방법을 카드 아니면 현금으로 전환했죠.”
이듬 해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이러한 경영 구조조정이 결실을 맺었다. 피해액은 45만원 가계수표 단 한 건뿐이었다. 이후 전산 관리를 도입, 바코드 재고 관리로 오프라인의 내실을 꾀하고 이후 온라인 홈페이지도 개설했다. 2005년에는 상호를 ‘공구몰(www.공구몰.kr)’ 바꾸고 상표등록과 지적재산권 등록에도 철저를 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