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 직업 전전했지만 내게 맞는 공구는 ‘노래’
소리꾼 장사익
노래 한 곡으로 가슴 속 얼음 녹여
그가 부르는 노래는 슬픈 소리를 토해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처연하다. 동시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목소리의 흡인력도 강하다.
“바보들 같아유. 요즘 사람들 정작 슬플 때는 많이 울지 않잖아요. 울어야 할 때는 눈물 흘리지 못하다가 하찮은 유행가 하나에 눈물을 흘려. 그런데 눈물을 흘리는 일이 부끄러운게 아녀유. 인간적이고 순수한 면이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울음이라는 것은 가슴 속에 박힌 얼음을 녹이는 것이고. 얼음이 봄이 되면 녹아내리듯 가슴 속의 응어리들이 녹는 겨. 울고 나면 개운하잖아요. 울고 싶을 때 제대로 울면 가슴 시원합니다. 뜨거운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것처럼. 그래서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해유. 그런데 막상 눈물이 나오지 않다가도 하찮은 노래에 사람들이 운단 말이지. 공연을 다녀보면 내 노래에만 그런게 아니라 딴 사람 노래에도 사람들이 울고 그래요. 그래서 먹고 사는 것도 바쁜데 왜 사람들은 노래를 들을까. 왜 저렇게 노래를 듣고 하는 것에 투자를 할까 생각을 해봐야 해요. 분명 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죠.”
얼마 전 그는 장모와 동생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동생이 눈을 감기 전, 아픈 동생을 위해서 그는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친구들 친척들이 와서 마지막으로 만나보라고 노래를 한 것. 동생이 눈을 감기 전 이별하는 의식으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노래가 하찮을 수는 있어도 어느 사람에게는 눈물로 몸 안을 슬픔을 뽑아내는 도구가 된다고 한다. 울기 위해서 그의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다고.
“노래 중에 ‘꽃구경’이 있어요. 엄마 업고 산에 놓아두고 오는 것이 노래 내용인데 그것이 전설이지만 내가 볼 때 요즘에도 그래요. 엄마 아프면 양로원, 요양병원에 집어넣잖아. 옛날에는 모셨지만 요즘은 안그렇잖아요. 언젠가 한 번은 노인분들이 많이 계신 곳에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좀 그래서 꽃구경을 안 불렀는데 노인네가 와서 왜 그 노래를 안하냐고 묻더라고. 지금 그 노래를 부르기엔 그래서 다음에 부르겠다니. 노인네가 아나 울라고 왔는데 씨. 그러더라니까.”
대개의 유행가는 꽃피는 봄날만 이야기하고 연애의 달달함을 이야기한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겨울 같은 비극은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사익이 발표한 앨범에는 그런 노래가 꼭 들어 있다.
“요즘 노래하는 가수들은 언제나 젊고 예쁘고 멋있어야 된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내 생각에 요즘 가수들은 대부분 첫 인생살이를 가수로 시작해요. 그런 가수는 보기 좋은 꽃만 보고 노래하는 거야. 나 역시도 꽃 같은 이야기가 있고 사랑 이야기 있지만 그래도 살아온 이야기도 있거든. 사람이 다 즐겁고 화려한 노래만 한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지겨워. 노래 중에는 레퀴엠도 있어야 하는거지. 아주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작은 빛만 보아도 밝아 보이잖아. 슬픔으로 슬픔을 털어내는 것이고. 무거운 노래도 있고 가벼운 노래도 불러서 울고 웃고 해야지. 죽음이나 어둠을 알면 밝은 시간에 사는 한 시간 한 시간이 즐겁고 기쁜 것 아니겠어요?”

뭘 해도 안 풀리던 44년, 소리에 담다
그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았다. 차를 권하고 과일을 권하는 얼굴과 표정은 한 없이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이처럼 밝은 기운을 가졌으면서 노래를 부르면 듣는 사람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재주를 얻게 된 과정이 궁금했다.
“난 매일 즐거워유. 그런데 부르는 노래는 좀 슬퍼. 사실 노래가 내 이야기거든. 내 이야기를 하는데 곡조를 붙여요.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찔레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인이 시로 썼어요. 내가 음을 넣고 감정을 넣고 느리고 빠르게 고조 장단을 넣으니 노래가 되는 것이고요. 나는 노래 할 때 가장 즐겁습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니까.”
그는 고교 졸업 후 25년 동안 15개의 직장을 전전하는 삶을 살았다. 군 제대 후 작은 무역회사에 일하다 여우목도리에 꽂는 핀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딸기 장사도 했다. 연구소 경리과장, 전자부품회사 영업사원으로도 일해 보았다. 청계천 전자상가와 가구점에서 일도 해보고 독서실도 운영해 보았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해 마지막에는 매제가 하던 카센터에 들어가 일을 했다. 편하게 대하던 매제를 깍듯이 사장님으로 모셨다. 그러나 카센터에서 계속 일하는 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한 달 100만원 받던 월급도 점차 줄어들어 50만원 받는 것도 힘겨워 졌다. 문득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이유가 이렇게 대충 살다 떠나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종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죽 써보았어유. 마지막으로 쓴 것이 태평소입니다. 직장을 전전하면서도 태평소도 배우고 노래 학원도 다니고 그랬거든. 밥하고 김치만 먹더라도 딱 3년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죠. 카센터를 그만두고 태평소를 수 없이 입술에 피나게 연습하고 사물놀이패를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사물놀이 공연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가 툭툭 나오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라고.”
1994년 주위의 권유로 나이 마흔 여섯에 작은 극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100석 남짓의 작은 극장에 800여명의 사람이 몰렸다. 장사익 이름 석자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에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는 것은 가수를 하기까지 오래 방황하며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바로 내가 가진 공구
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왔기에 친숙한 공구가 있지 않을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친숙한 공구는커녕 손재주가 없어 공구로 사고치는 일이 많았단다. 그중 기억나는 일은 가수 유열씨와의 인연이다.
“신사동에서 매제가 하는 카센터에서 일을 할 때 가수 유열씨가 최고의 고객으로 오곤했어요. 옛날에는 좋은 차를 사면 코팅을 한번 했거든. 지금은 안하지만 옛날에는 카시트도 하고 그랬을 때니까. 당시 카센터 사장인 매제한테 나도 밥벌이를 해야겠다. 그래서 기계를 좀 사서 해보자고 했는데 첫 번째 손님이 하필 가수 유열이야. 최신형 새차를 뽑아서 코팅 부탁하더라고. 코팅을 하기 위해서는 그라이더로 차를 한번 다듬어 줘야하는데 살짝만 해야지 조금만 힘을 주면 차가 망가져요. 그런데 아차 하다가 내가 망쳤네? 이를 어쩌나? 어떻하긴. 죄송합니다. 무릎 꿇다시피 사과해야지. 내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을 서비스 한다고 아주 힘들었어요. 그러다 데뷔하고 96년도에 하야트 호텔에서 노래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대기실에 가보니 유열이 있는거야. 아이쿠야 이를 어쩌나. 옷을 갈아 입으려면 가방을 가지고 대기실에서 갈아 입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 그렇게 유열씨를 다시 만나 인사를 했지. 나 아시겠어요? 하니 어? 여긴 왠일이예요? 하길래 노래하러 왔습니다. 말했더니 한바탕 웃더라고. 아무튼 난 펜치 니퍼 같은 공구를 사용하며 먹고 사는 것은 영 아니었어. 어떤 공구가 내게 맞는가 어떤 공구를 사용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가 25년을 찾아 봤는데, 내게 맞는 공구는 바로 노래였어요.”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내 길이 아니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세상을 탓하지는 않고 포기하지 않던 그는 마침내 자신에게 꼭 맞는 공구. 노래라는 공구를 찾을 수 있었다.

죽을힘 다해서 사는 것이 인생
성공한 공구인들 대부분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대출을 갚아나가며 사업체를 성장시켜나간다. 빚을 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더욱 성실하게 일을 하게 만든다. 상황만 좋다면 대출도 몸에는 좋지만 쓰디쓴 한약과 같다. 소리꾼 장사익도 그런 빚이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을 성장시키게 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일생 중 몇 년은 긴장을 하면서 살아야 해요. 나도 45살까지 빚이라는 것을 몰랐어유. 돈을 꾸지도 않고 주지도 않고 마음 편하게 살았쥬. 그러나 가수 데뷔하고 북한산 기슭에 보기 좋은 집을 사고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빚을 가지니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 긴장도 없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죽을힘을 다해서 해보자.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10년은 노력해봐야죠. 사람은 누구나 몇 번은 기회가 오고 찬스가 찾아옵니다. 나는 요즘 젊은 가수들과는 다르게 늦은 나이에 노래를 시작했는데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죠. 노래를 못 부르면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긴장하며 사는 겁니다. 목에 이상이 오면 최선을 다해서 관리를 하는 거고.”
작년 초 그는 성대에 혹이 생겨 목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 직후 2주 동안 벙어리로 살아야 했고 8개월 동안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노래를 공구삼아 먹고 살던 사람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니 그때의 심정은 말도 못하게 괴로웠다고. 혹시나 재활이 잘 안되어 다시금 소리를 예전처럼 내지 못할까하는 두려움도 찾아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노래를 부르는 것 아니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으로 돌려 결국 재활에 성공했다. 가수 생활 20년 만에 찾아온 위기를 잘 이겨냈다.

청계천 공구인처럼 오래오래 노래 할 것
소리꾼 장사익은 중년의 나이와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이루고, 꿈을 이룬 뒤 찾아온 갑작스런 위기도 잘 넘겼다. 그런 사람으로서 계속되는 불황에 힘들어하는 공구인에게 해줄 조언과 그가 가진 앞으로의 목표도 물었다.
“내가 가수생활 하다가 성대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 한 것은 어찌보면 잘 달리다가 넘어진거고 장사하다가 부도위기 몰린 거예요. 노래를 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꽃밭에 있는거야. 그런데 사람이 늘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늘 꽃밭에만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불황이 있으니 활황도 있고 사람 인생이 그래요. 그리고 어떤 불황도 나 혼자 힘든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다 힘들잖아요. 세상은 똑같아유. 우리나라도 그동안 많이 힘들었잖아유. 분위기도 안 좋았고 추운 겨울이 와서 아주 힘들었지만 어찌보면 겨울 잘 보내고 따뜻한 봄을 맞이했다고 봅니다. 더는 어려워지지는 않겠죠. 제가 볼 때 더 이상 내려갈 길이 있을까 싶어요. 게다가 이런 불황에도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어요. 멀리 보고 나름의 의욕을 가지고 하면 힘든 위기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살면서 보아온 청계천 공구인들은 어떤 위기도 극복하는 사람들 이예유. 공구인 중에 장사를 겨우 몇 년만 하다가 끝내려는 사람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공구인들이 수 십 년 오래 오래 장사하는 것처럼 나도 과거 20년 노래를 불렀으니 앞으로 20년 더 노래를 불러야지유.”
장사익씨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청계천에서 일하는 공구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기억 속 공구인들은 언제나 성실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남아있다. 공구인이 산업현장에 필요한 공구를 오래 오래 제공하는 것처럼 소리꾼 장사익도 사람 마음을 달래는 노래를 오래도록 부를 것이다.
글_한상훈·사진_정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