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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 자동차 명장 박병일
정비업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공구는 빌려주되 기술은 빌려주지 마라.’ 하지만 박병일 명장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베트남, 태국의 자동차 전문가를 무료 교육시킨 인원만 대략 20만 명이 넘는다. 또한 37여권의 전문서적들을 출간해 정비사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평생 공부해 익혀온 기술을 남들에게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기술을 저만 가지고 있었다면 기술자가 되었겠지만 자만했을 겁니다. ‘아무도 몰라 나만 알아’하는 생각에 스스로의 발전도 가지질 못했겠죠. 내 것을 남에게 주고나면 나만의 기술은 없어진 거니까 그때부터는 새로운 것을 연구하게 되었어요. 주변에서는 남들을 도왔다, 혹은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고 하지만 결국 저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서 기술을 알려 줬다는 생각을 합니다.”
1971년 소년 박병일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영등포에 있는 버스회사 정비공장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당시 서울에는 버스가 600대 정도밖에 없어서 견습공으로 들어간 것만도 큰 행운이었다. 3개월 동안 공장장님을 매일 찾아다니며 조른 덕에 봉급 없이 밥만 먹여준다는 입사조건이었다.
“그나마도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일이 힘든 것은 견딜만했지만, 기술은 안 가르쳐주고 잔심부름과 허드렛일만 시키는 것은 마음 아팠어요. 많은 시간이 지나도 기술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큰 고통이더군요.”
당시 정비업계는 기술을 쉽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풍토였다. 정비사들에게 언제쯤 기술을 배울 수 있냐고 물었더니 1년은 지나야된다는 말이 그를 힘들게 했다. 가까운 형님에게 하소연을 하니, ‘모든 것은 책속에 있다’며 구하기 어렵겠지만 <자동차대백과사전>을 구해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정말 책 속에 모든 것이 있더라고요. 책을 보고 공부하고 실무도 연습하니 딱 2년 뒤에 정비사로 인정을 받더군요. 남들은 10년 걸렸거든요. 정비사도 공부만이 살 길 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주위에서 정비기능사 시험에 응시해 보라고 권해서 1977년 자동차 정비기능사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고 1978년 1급 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때는 다들 놀라더군요. 군 영장이 나왔는데 1급 자격증이 있어 수송정비부대에 입대했어요. 복무 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자동차 책을 구입하고 이론과 실무를 정리하고 또 후임들에게 강의했죠. 그 덕에 1979년 자동차 검사 1급을 비롯하여 중기정비 1급, 중기검사 1급, 교사면허까지 줄줄이 취득했어요. 군대 제대 후에도 여러 자격증 덕분에 정비사로 취직이 손쉬웠죠.”
새로 취직한 회사에서도 솜씨 좋은 정비사로 월급을 많이 받았지만 집안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가 못 배운 한이 있어 동생들 학비는 어떻게 해서든 대주다보니 가불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적금을 부어 목돈을 만드는 동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신세팔자를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다 <철강 왕 카네기>와 <인생은 30대에 걸어라>라는 책을 읽고 일을 한번 저질러 보기로 결심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일반 샐러리맨은 만져보지 못할 돈을 벌 수 있었다.
“당시 회사의 상무님 봉급이 32만원인데 내가 31만원을 받았으니 분명 특급대우였죠. 그런데 독립해서 자동차 도급 일을 수주해보니 월100만원씩은 남더라고요. 그해 1년 벌어 21평 아파트 한 채를 사 이사를 하던 날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죠. 하지만 도급업으로는 올라가는 부품비와 인건비를 따라가기 힘들었어요. 다음 사업 준비가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자동차 기술을 서로 얘기하고 논하는 ‘한밝자동차연구회’에 갔더니 독일 출장 갔던 한 회원이 독일 오펠정비 지침서를 보여주더라고요. 유럽에서는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자동차에 전자부품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니 우리도 전자공부 좀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더군요. 회원들 대부분이 전자제어 차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면 최소한 10년은 걸릴 거라며 남의 집 얘기하듯 했어요.”
그러나 박병일 명장은 홀로 전자제어 시스템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나 회원들은 우리나라에 그 차가 들어와 고칠 때쯤이면 우리는 은퇴해야 될 나이인데 왜 사서 고생이냐며 염려 섞인 말을 했다. 그런데 10년 후에나 나올 것이라던 전자제어차량이 3년 후인 1986년 처음 우리나라 차량에도 도입 출시되었다. 최고급차인 그랜저와 로열살롱이었다.
전자제어 시스템을 탑재 차량을 수리할 수 있는 정비사는 전국에 몇 명이 없었다. 당시 전자제어차량들은 고장도 잘나지만 고치는 곳이 별로 없어 고장이 나면 일단 그의 업소로 보내졌다. 전자제어차량에 대한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축적되자 책을 쓰고 강의를 시작했다. 1992년 박병일 명장은 <자동차 생활사(현, 카테크)>에 현장정비사례를 기고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어 교통방송과 TV방송에서 자동차 상담을 하고, 자동차잡지에 정비사례는 물론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정비시승기를 썼다. 또한 자동차 정비의 최고봉인 자동차 정비기능장 자격을 1994년 취득했다. 그러자 못 고치는 차량이 없다는 소문이 일반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졌다.
“하루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한 대기업 연구원이 차량을 몰고 왔어요. 자기는 새벽 1시쯤 퇴근을 하는데 공동묘지 옆을 지나갈 때마다 차량에서 삑! 하는 큰 소리가 난다는 거예요. 그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아무리 정비소를 돌아다녀도 고치질 못한다는 겁니다. 짐작 가는 곳이 없냐고 물으니 자기가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친 적이 있는데 그때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대요. 그 원혼이 차에 붙은 것이 아닌가 한다는 거예요. 확인할 겸 새벽 1시에 그 차 옆에 혼자 있었어요. 시동을 끄고 소리가 날 부분은 다 점검 했으니 소리가 날 리가 없다 확신했죠. 그런데 새벽 1시가 되자 새 죽는 소리랄까. 기분 나쁜 소리가 차에서 났습니다.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요. 저도 정말 무섭더라고요. 정신 차리고 차량을 곳곳을 점검했는데 알고 보니 뒷자석 시트 깊숙한 곳에서 삐삐가 나오는 겁니다. 잃어버린 삐삐의 알람이 울렸던 거죠. 물론 그 차량 지금도 쌩쌩 달리고 있을 겁니다.”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자동변속기, 전제제어엔진, 휠 얼라이먼트 관련 공부와 연구를 계속했다. 그렇기에 당시 많은 사회문제가 되던 급발진 현상의 재현실험을 성공시키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가 제시했던 문제와 방법을 건교부와 제조사가 받아들이게 된다. 급발진 사례가 줄어든 것은 물론이다.
“급발진은 기계식 카뷰레터 방식이 아닌 전자제어엔진 즉 센서신호를 받는 엔진 컨트롤 제어장치인 ECU가 장착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전자부품이란 온도, 습도, 진동에 약한 것인데 그 3요소가 자동차에는 모두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ECU는 입력신호에 따라 출력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어요. 내 차로 먼저 실험을 했어요. 석 달 정도 실험하면서 그동안 의문시 되었던 rpm급상승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죠. 중고차를 다섯 대나 사서 실험했는데 다섯 대 모두 급발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로들이 모여 2002년 대한민국 자동차 정비명장(정비업계1호)에 선정되고 2006년 기능 한국인으로 선정된다. 2005년 정부로부터 정비 업계 최초로 산업포장을 받은 후 2011년에는 직업능력개발유공 최고 훈장인 은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돈은 많이 벌지 못해도 어렵게 터득한 기능을 후학에게 전수하고 남을 돕는 봉사활동에 매진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기능인이 대우받는 사회, 기능인이 자부심을 가지는 사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앞으로도 많은 기능인들을 교육하고 베풀며 살아갈 박병일 명장을 응원한다.
글· 사진 _ 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