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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토크를 조정하는 일이다
삶은 토크를 조정하는 일이다
‘목수의 인문학’ 저자 임병희 칼럼 연재 ‘공구 통해 인생 논한다’

욕심과 필요의 사이에서
중국의 고대 유물 중에 ‘삼정(三鼎)’이라는 것이 있다. 다리가 세 개인 솥, 즉 세발솥이 삼정이다. 그런데 이 세발솥에는 이상한 짐승의 문양이 각인된 경우가 많다. 이 이상한 짐승이 바로 도철이다. 도철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네 가지 흉한 동물 중 하나다.
도철은 사람의 머리에 양의 몸을 하고 있다. 얼굴도 정상적이 아니어서 머리엔 뿔이, 입에는 호랑이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있다. 도철의 가장 큰 특징은 무지막지한 식욕이다. 사람은 물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지만 언제나 배가 고픈 짐승이 도철이다. 하지만 그는 일을 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다. 그러면서도 또한 비굴하다. 강자에게는 굽실되지만 약자는 짓밟고 군림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세발솥에 도철을 새긴 이유는 자신의 몸까지 먹어버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탐욕을 경계하고자 함이었다. 사람들에게는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찾아내는 현명한 눈이 있다. 도철과 같은 탐욕의 상징을 통해 탐욕을 경계하는 것 또한 그렇다.
사람은 항상 경계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필요와 욕심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자신을 해칠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마땅히 균형을 잡아야 하지만 그렇기 힘든 것이 또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너비 10센티의 평균대에서도 걷고 돌고 회전할 수 있는 균형 감각이 있다. 몸이 그러하다면 마음도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전동드릴, 균형과 방향 맞아야 성공
균형과 중심을 찾으면 그 때에 들어맞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목공방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 그 때에 들어맞게 사용해야만 하는 공구가 있다. 처음 가구를 만들 때, 가장 많이 그리고 제일 먼저 만지게 되는 공구가 전동드릴이다. 처음 시범을 볼 때는 전동드릴을 사용하는 일이 쉽게만 느껴진다. “쑥”하고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나사를 끼우고 다시 “드르륵”하고 돌리면 그만인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직접 전동드릴을 손에 쥐면 그게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TV의 홈쇼핑에서는 쉽게도 구멍을 뚫고 나사를 조이지만 그건 연출된 화면일 뿐이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 세상이다.
구멍을 뚫고 싶은 부분에 먼저 ‘×’자 표시를 한다. 그곳에 드릴을 갔다 대지만 옆으로 밀리기 일쑤이다. 그곳에 드릴을 넣었다고 끝이 아니다. 나는 일직선으로 드릴을 박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시일 가능성이 높다. 비스듬히 들어가는 드릴을 보며 급히 직각으로 방향을 바꾸면 “뚝”하고 드릴비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구멍 하나 뚫는 일도 그리 쉽지 않다.
그런 경험은 드릴만이 아니지 않는가? 언제 우리가 내가 원하는 그곳을 향하여 정확하게 나아간 적이 있던가? 우리는 흔들렸고 방황했으며 심각한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가야할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심을 잡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면 조금 흔들리더라도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어차피 삶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좌표를 찍고 바다를 항해 하는 배도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삶은 지그재그로 간다. 하지만 능숙한 조타수를 둔 배가 기어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처럼 삶도 방향을 잃지 않으면 그곳에 가게 된다. 숙련되면 드릴을 곧게 박을 수 있다. 하지만 완벽한 곧음은 없다. 드릴이 회전하면서 손도 함께 흔들린다. 그 흔들림을 이겨내고 원하는 위치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 드릴도 배도 삶도 그렇게 흔들리며 가는 것이다. 그것이 항로이다. 당황하여 성급하게 키를 돌리지 않는다면 배는 항로를 이탈하지 않는다. 항로를 이탈했다 해도 우리에겐 키가 있기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조금 더딜 뿐이다.
나 중심 아니야 … 상대 맞춰 토크 조정하라
전동드릴에는 방향을 결정하는 버튼과 함께 토크를 조절하는 부분이 있다. 드릴의 비트를 고정하는 머리 부분 뒤쪽에는 숫자가 써 있다. 그 숫자가 토크를 의미한다. 토크는 돌리는 힘, 즉 회전력을 말한다. 기계마다 다르지만 공방에서 쓰는 전동드라이버에는 1부터 20까지의 숫자가 적혀있다. 이 숫자는 장식이 아니다. 숫자가 작으면 회전력도 작아진다. 회전력이 작다는 것은 적은 힘으로 드릴이나 나사를 돌린다는 뜻이다. 반대로 숫자가 커지면 회전력도 함께 커진다.
토크를 돌리는 존재는 자신이지만 토크를 결정하는 기준은 내가 아니다. 토크는 나무에 따라 정해진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언행이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발산하는 것처럼 토크는 나무라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목공에서 맥락을 아는 것은 나무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무는 모두 같지 않다. 사람이 다른 것처럼 쉽게 상처받는 나무가 있고 강인하여 굳건한 나무가 있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으로 나무를 대해야 한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아야 한다.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사와 상중에 누가 더 어집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공자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사가 낫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자가 다시 대답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 『논어論語』 「선진先進」 中
사는 공자의 제자 중 하나인 자장의 이름이고 상은 자하의 이름이다. 우리는 흔히 지나친 것이 모자란 것만 못하다고 알고 있지만 공자는 지나친 것이나 미치지 못하는 것 모두가 같다고 이야기한다. 지나친 것이나 모자란 것이나 모두 중용의 도를 얻지 못했음을 말한다.
토크의 숫자를 1로 맞추면 애쉬나 오크 같은 하드우드는 말할 것도 없고 스프러스 같은 소프트 우드에도 나사를 박을 수 없다. 반대로 삼나무처럼 약한 나무에 나사를 박으며 토크를 최대치인 20으로 맞춘다면 어떻게 될까? 나사가 나무를 뚫고 반대편으로 터져 나오는 참사가 발생한다. 토크는 그 나무의 단단함에 맞출 때, 최적의 효과를 낸다.
나무를 자주 만지다 보면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항상 같지 않다. 나무에는 결이 있고 또 더 단단하거나 무른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조금씩 숫자를 조절해야 한다. 나무에 딱 들어맞는 힘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무를 미루어 토크를 결정하는 것처럼 치우침 없이 살아야 한다.
공자가 말했다.
천하의 국가도 가히 고르게 할 수 있고,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고,
흰 칼날도 밟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
- 『중용中庸』 中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높은 관직과 봉록도 사양할 수 있다. 서슬 퍼런 칼날 위도 걸을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고 공자는 말한다. 중용은 물리적이거나 공간적인 중간지대를 이르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때에 따라 중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토크를 나타내는 1부터 20의 숫자 가운데 10이 중용인 것이 아니다. 나무에 따라 달라지는 그 숫자가 전동 드라이버의 중용이 된다. 숫자는 상대적이고 삶은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조절해야 한다.
당신의 토크는 어디에 맞춰 있습니까
전동드라이버를 쓸 때마다 나는 토크를 다시 조정한다. 삶은 토크를 조정하는 일이다. 왼 편과 오른편을 오고 가며 항해하는 배이다. 직선으로 가는 배는 없다. 직선으로 가는 인생도 없다. 미혹되고 현혹돼도 방향을 잃지 않으면 갈 수 있다. 넘치거나 미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 수 있다. 전동드릴의 토크는 20까지이지만 우리 인생의 토크는 무한하다. 무엇이든 뚫어버릴 수 있는 더 큰 힘을 가질 수도 있고 아무리 약한 나무라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정밀하고 미세한 힘을 가질 수도 있다. 지금 내 인생에서 맞춰야 할 토크는 몇이 되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