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초대형 공구도난사건
지난 2월 14일 대구 중부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여기 동인네거리 인근인데요, 누가 제 공구박스를 훔쳐갔어요. 방금까지 차에 있었는데 … 우린 공구가 있어야 먹고 사는데, 꼭 좀 찾아주세요.”
최근 들어 자주 접수되던 공구도난사건이 또 발생했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공구를 훔쳐 달아나는 수법으로 흔적이 없어 체포가 쉽지 않았다. 전화를 받은 생활범죄수사팀(방봉욱 팀장)은 단서가 사라지기 전에 곧장 현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피해자 바로 뒤 차량에 블랙박스가 반짝이는 게 눈에 띄었다.
화면 속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피해 차량이 정차한 건물 주변을 몇 바퀴 돈다. 잠시 후 열려 있는 차량으로 다가와 공구함을 들고 오토바이에 싣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범인의 오토바이에는 훔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구함이 두 개나 더 보였다.
이렇게 확보된 블랙박스와 CCTV 화면에 의존해 추적한지 닷새째. 마침내 범인의 오토바이가 남구 대명동 성당시장 뒤편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주거지나 사무실은 오리무중. 골목 안까지 범인을 따라잡기 위해 오토바이 125cc 두 대 빌려서 다시 5일을 매복한 끝에 범인이 나타났다. 그는 시장 뒤편 좁은 주택가로 들어가더니 장물 보관용으로 보이는 가정집으로 들어섰다. 검거를 위해 뒤따라 들어선 경찰은 집 내부를 보고 경악했다. 그곳엔 훔친 공구 총 2000여 점이 부엌과 방마다 발 디딜 틈 없이 쌓여 있었다.
인테리어 업자로 일해던 이모 씨(45)는 공사현장을 잘 아는 점을 이용, 차량에 실려 있는 공구를 주 대상으로 삼았다. 인부들이 작업 중에 관리가 허술한 점 이용했는데 특히 점심시간 잠깐 자리를 비운 새를 노렸다. 공사 현장 외에도 오며 가며 공구가 보이면 무조건 들고 갔다. 트럭에 공구를 싣고 가는 차량을 보면 미행해서 정차할 때를 노려 들고 가는가 하면 심지어 공구상에서 밖에 내 놓은 물건을 집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2013년 1월부터 범행을 시작해 장물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 수시로 매매했다. 주로 고가의 새 건 위주로 처분했다. 2년 동안 꼬리가 잡히지 않자 이 씨는 그동안 모아놓은 물건을 정리해 중고공구상을 오픈할 계획을 세웠다. 범행은 더욱 대담해졌고, 6개월 전부터는 비 오는 날 빼고 매일 공구를 훔치러 돌아다녔다. 하루 2건에서 많게는 7~8건씩 훔쳤다고 자백했다. 이렇게 모인 물건은 남구 대명동의 허름한 집을 빌려 장물보관창고에 쌓아 두었다. 당시 현장에 가장 먼저 들이닥친 방봉욱 팀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깜짝 놀랐지요. 이만큼이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일반 가정집이라 생각하고 문을 열었는데 공구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으니까요. 이걸 어떻게 옮겨가나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어요. 3.5톤 트럭을 불렀는데 한가득 실렸어요. 형사 생활 15년 동안 관내 최대 사건입니다. 보통 처분할 목적으로 훔치는데 이렇게 모아놓고 중고공구상을 개업하려 했다는 것도 특이하고요.”
장물을 정리하고 분류해 라벨을 붙이는 작업만 꼬박 이틀 걸렸다. 총 2천여점, 시가로는 3억5천 만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현재까지 접수된 피해자는 80여명, 이들 대부분이 범인 검거 후 자신의 공구를 찾아갔지만 이미 팔려나가서 찾지 못한 물건도 상당수다. 우여곡절 끝에 공구를 찾아간 사람들의 에피소드도 줄을 이었다.
K씨는 범인 검거 이틀 전, 공사계약서 등 중요한 서류가 든 공구함을 통째로 도난당했다. 그는 공구함을 찾지 못했으면 큰 문제가 생길 뻔했다고 아찔해했다.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B씨는 범인이 트럭 발전기를 훔쳐가 일주일 동안 장사가 올 스톱됐다. 100만원 내외 비싼 물건이기 때문에 하루 벌어먹고 사는 입장에서 당장 살 엄두를 못 냈다고 한다. L씨는 160만원짜리 함마드릴을 사서 사용한지 2시간만에 도난당했다. 한발 늦었으면 인터넷 거래로 팔려나갈뻔 했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름 모를 특수공구인 400만원짜리 고가 공구도 주인을 찾았다. 워낙 다양한 공구가 총망라되어 있어 경찰들도 공구 명칭을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고. 다행히 피해자 중에 공구박사가 있어 차분히 이름을 알려주고 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또 한 번 놀란 것은 피해자들의 공구에 대한 애착이다.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피해자들이 몰려들었어요. 신기하게도 잃어버린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눈 감고도 설명하더라고요. 어느 위치 어느 방향에 이름을 써 놨다, 어느 쪽에 흠이 몇 센치쯤 나있다, 어디어디에 콕 찍힌 자국이 있다, 내 공구상자는 잠금장치를 쇠로 덧붙였다 등등. 그 말대로 비슷한 물건을 찾아보면 진짜 설명한 그대로예요.”
자기 분신이나 다름없는 공구를 찾아줘서 고맙다며 국민 신문고 게시판에 감사인사를 전한 사람도 있다. 담당 형사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시민들의 격려 한마디가 정말 큰 힘이 되고 뿌듯하다”고 전했다.
많은 공구가 주인을 찾았지만 아직 2/3에 달하는 1500여점이 주인을 찾지 못한 채 경찰서 한편에 잠자고 있다. 이 많은 공구를 다 보관하기에는 장물보관실 용량이 턱없이 모자라 현재 경찰서 뒤편 건물 복도에 보관된 상태다. 경찰은 압수한 공구만으로는 피해자를 확인할 수 없는 탓에 피해자들이 찾아와주기만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많은 양의 공구를 언제까지 갖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최소 한두 달은 더 기다려볼 작정이지만 마지막까지 주인을 찾지 못한 물건은 공매처분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는 영영 자기 물건을 찾지 못하게 된다.
방봉욱 대구 중부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장은 “보관상 어려움 때문에 공매 처분해 국고로 귀속하면 편하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공사현장 근로자들에게는 공구가 또 하나의 생계 수단일 수 있다”며 “또다시 수십~수백만원을 들이지 않도록 최대한 피해자들 찾아내 돌려주고 싶어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