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SPECIAL] 근성에 미쳐라! 만화가 김성보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드라마틱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해야 했고, 곧이어 닥친 엄마 없는 설움과 극도의 빈곤함은 어린 시절 도저히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콤플렉스를 나에게 선사했다. 그 미쳐버릴 것 같은 절망과 좌절, 고통은 갓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가슴 밑바닥에서 날것같이 고개를 쳐드는 조그마한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근성(根性)’이었다. 모쪼록 ‘근성’에 관한 내 생각을 적어놓은 이 글들을 보며 공구인들이 한 줌의 위안과 영감이라도 받기를 바란다.

근성은 대단하거나 특별한 위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자신이 정한 가치와 목표를 위해 버티어 나가는 것이다. 몸이 부서지고 찢어지고 빠개져도 버티는 힘. 오기와 독기와는 다른 진정한 정당성으로 내 몸과 정신을 올곧게 만들어 치고 올라가는 힘.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원하는 바를 이루어왔다.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죽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더라도 내 인생에 승부를 한 번은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죽기 전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 정신으로, 세상을 향해 도전해보자!” 그런 마음을 먹으면서 내 인생은 달라졌다.
실패는 그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일 뿐이다. 이기고 지는 일, 성공이나 실패는 인생에서 늘 있는 것이다. 내가 만화계에 발표했던 약 400개 타이틀 중 히트 타이틀은 단 7개뿐이다. 나는 393개 타이틀이나 실패했다. 그래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되 결과의 승패에는 초연하다. 그것이 나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나약한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자세다. “저걸 왜 해?”, “저런 걸 왜 만들어?”, “그 돈과 그 시간으로 딴 걸 하겠다.” 이런 게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인간들이 하는 말이다. 이윤이 나던 나지 않던 미래가 있든 없든 일단 뭔가를 만들고 뭔가를 해야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움직여야 나중에 기회라도 찾아온다.
WHO

김성모
작가로 데뷔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인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도전의 다른 이름이다. 잡지나 신문에 연재하려고 수십 번 도전했었다. 하지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나를 불쌍하고 한심하게 보는 시선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가슴 아픈 일이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잡지사를 나온 나의 주머니에는 항상 딱 다시 돌아갈 차비만 있었다. 나는 매번 그 차비를 길가 노점에서 파는 어묵꼬치와 국물로 위로 삼는 걸 선택했다. 그러고는 안양에 있는 집까지 무작정 걸었다. 대개 잡지사나 신문사는 서울에 있었으므로, 3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했다. 찜통더위에는 땀으로, 비가 오면 빗물로, 눈이 내리면 눈으로, 얼굴을 들어 눈물을 감췄다. 터져버릴 것 같은 복수심을 되새기며 온종일 걸어 집에 도착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가 생겼다. 마음속에 새긴 근성으로 그렇게 버텼다.
김성모 화백의 인기작품
요즘은 네이버웹툰이 만화를 볼 수 있는 가장 큰 제공처라면, 당시에는 <보물섬>이라는 잡지가 만화를 독자에게 서비스하는 가장 큰 제공처였다. <보물섬> 기자를 만나 내 그림을 보여줬다. 그때는 그 기자와 별말 없이 헤어졌는데, 몇 개월 있다가 연락이 왔다. <보물섬>에 데뷔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3일 만에 단편 하나를 가지고 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작가들은 종종 펑크를 냈다. 그래서 기자들은 땜질용 원고를 몇 개씩 가지고 있어야 했다. 마침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데 기자가 쥐고 있는 원고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약속」이라는 작품을 3일 만에 만들어서 가지고 갔다. 부랴부랴 서둘러 만든 작품이었는데, 공개하고 나니 26개 작품 중 9위를 해버렸다. 기대하지 않은 좋은 반응에 잡지사에서 연재를 제의했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미친 듯이 일했고 그 노력이 결과로 드러났다. 내 만화는 전체 순위 5위권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매일 불같이 열정을 불사르며 열심히 그림 그리고 연재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잡지 판도 마찬가지였다. <보물섬>은 점차 쇠퇴하는 상황이 되었고, 만화 시장 자체가 주간지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의 ‛네이버웹툰’과 ‛카카오웹툰’처럼 당시 주간지에도 양대 산맥이 있었다. <아이큐 점프>와 <소년 챔프>였다. <아이큐 점프>에는 『드래곤볼』이 있었고 <소년 챔프>에는 『슬램덩크』가 있었다. 만화 이름만 들어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게 주간지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나도 이왕이면 만화 시장의 중심부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년 챔프>에서 먼저 도전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항상 그래왔듯이 나는 실패했다고 쉽게 주저앉지 않았다. <아이큐 점프>로 넘어갔고 다시 도전했다. 거기서 『마계대전』을 냈는데 그것이 큰 인기를 가졌다.
만화계에 입문하고 작가로 데뷔한 지 약 30년이 됐다. 창작한 만화는 총 약 2,000권, 400개 타이틀에 이르고, 그중 7개 타이틀을 히트 쳤다고 생각한다. 총제작 편수와 비교하면 적은 비율이지만, 적지 않은 작품을 히트 쳤다고 자부한다. 히트작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만화가의 수명은 아주 짧다. 잊히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런 작가들을 지금껏 수도 없이 보았다. 어찌 보면 작가들은 세상의 소모품일 뿐이다. 일해라. 죽도록 일해라. 게을러서 못 하는 것이 만화가라는 거 잘 안다. 핑계 대지 마라. 악착같이 돈 벌고, 충분히 모아놓은 후에도 육체가 터질 듯이 일해라. 사실 밖에 나가 놀아도 별거 없다. 몸 축나고 돈 쓸 일뿐이다.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소중한 가족의 생존을 위해 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Mini interview
만화계의 거장 김성모 작가.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강한 생존력, 악착같은 의지, 삶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서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뿌리를 따라가면 의외로 낯익은 현장이 나온다. 공구 좌판이 펼쳐진 경기 안양의 박달동 길거리. 그리고 새벽부터 밤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시던 공구인 아버지가 있었다.


김성모 화백님의 아버지도 대단한 근성을 가지신 걸로 알고 있는데 과거 공구상을 운영 하셨다고요?- “저의 돌아가신 부친도 사실상 공구 업계 쪽에서 바닥부터 시작하신 분입니다. 서울 남대문에서 도매로 공구를 떼오셔서 그걸 안양 시내 좌판 소매로 공구를 팔아 생활하셨죠.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쪽 경기은행 홍익서점 앞 길. 그 길에서 장사를 하셨습니다. 일이 끝나면 안양대교 옆에 보관소를 두고 물건을 보관하셨고요. 중학생 때 아버지를 따라 남대문에 가서 물건을 떼 와 아버지와 함께 정리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아버지가 장사 마치실 때는 저도 종종 물건 정리하는 것 도와드리고 리어카를 밀어드리기도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동네 건달들이 보호비라며 아버지 좌판의 공구를 그냥 집어가기도 했는데 그걸 본 제가 무슨 짓이냐며 건달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남들 눈에는 보잘것없는 좌판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전쟁터였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만들어 준 또 하나의 통로이기도 했고요.”
근성 넘치셨던 공구인 아버지로부터 배운 교훈 중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제게 자주 해주신 교훈은 ‘가족을 책임지고, 스스로 단단해져라’입니다. 아버지는 말로만 강인함을 설파하신 분이 아니었어요.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뒤 아버지는 어린 세 자녀를 홀로 키우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하시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장남인 저에게는 ‘네가 장남이다. 책임감을 가지고 동생들을 돌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로서의 책임감과 근성을 키워주시는 말들이셨죠. 그리고 사람을 너무 쉽게 믿지 말라는 말도 하셨습니다. 주변의 호의처럼 보이는 말들, 즉 ‘조언’이나 ‘응원’이라는 미명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중에 자신을 이용하려는 이들도 많으니 조심하라고 하셨죠. ‘혼자 설 수 있는 힘’을 강조 하신 것 같습니다. 그 힘이 작품을 만들고 취재하러 다닐 때나 사람들과 부딪칠 때 큰 버팀목이 되었고요. 아버지는 어떠한 상대든 지나치게 낮추어 보지도 말고 과도하게 두려워하지도 말라고도 가르치셨어요. ‘너보다 높아 보여도 결국 다 그저 그런 사람들이다.’라는 말씀도 하셨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 단단해져라. 그게 아버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자 교훈입니다.”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월간 TOOL 공구인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공구인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저는 공구상 사장님들을 보면 늘 존경심이 듭니다. 새벽부터 장사하시고 밤늦게 문 닫으시는 공구인 여러분. 땀 흘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여러분들이 바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고 산업의 근간입니다. 저의 아버지처럼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고 또 그런 분들 덕분에 대한민국 산업 현장이 굴러갑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구는 ‘송곳’입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도 있습니다. 날카로운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삐져나오듯 무릇 실력이 있는 사람은 숨어있어도 숨겨지지 않습니다. 공구인 여러분도 2026년에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전문성과 기술을 발휘하셔서 어려움을 돌파해 나가시길 응원합니다. 근성을 가지고 스스로 단단해지면 남이 흔들어도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2026년에도 힘내시고 가족과 일터를 지켜온 근성으로 2026년 큰 발전 이루시길 응원 합니다.”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그때는, 상황이나 여건이나, 기회 등이 지금과는 달랐다. 그때는 쉬웠다.”이런 말들이다. 하지만 그때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한마디 하고 싶다. 그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핑계 대지 마라. 함부로 얘기하지 마라. 나는 처참한 경험을 수도 없이 했다. 새끼는 태어났는데 주머니엔 십 원 한 장 없어서 동네 놀이터에 앉아 엉엉 운 적도, 황량하고 잔인한 세상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너무 힘들어서 갈 길을 잃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이 더 살기 쉽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제대로 살아가기에 힘든 건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세상에 그냥 쉽게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열정을 불태우며 끝까지 달려라. 실패에 빠지더라도 자존감을 잃지 마라. 원대한 목표를 정하고 반드시 이룬다는 확신을 가져라. 나 자신을 믿고 근성으로 버텨나간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내가 가장 깊은 감동에 빠졌던 순간은 예전에 갓 태어난 내 새끼가 손가락을 입에 물려주니 눈도 못 뜨면서 엄청난 힘으로 쭉쭉 젖인 줄 알고 빨아대던 상황에서였다. 기필코 살아남겠다는 핏덩어리의 엄청난 본능! 우린 그렇게 살아가야 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젖 먹던, 젖 빨던 힘까지 모두 폭발시키면서 말이다!

글·사진 _ 한상훈